여러분, 여러분은 지금까지 주기도문을 암송하면서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되뇌일 때마다 머리 속에 어떤 이미지가 있으셨습니까? 다시 말해서 어떤 내용을 구하셨습니까? 아마도 “오늘 먹고 살 수 있는, 필수적인 삶의 생존”과 관련된 내용을 구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예,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청년들이 그렇게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종종 성경을 읽다가 당황한 적이 없습니까? 분명히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는데, 성경에서 이와 완전히 모순되는 본문들을 접하게 될 때입니다.(저만 당황스러운 거 아니죠?) 일단 마태복음 6장 25절과 31절을 한번 보십시오.
-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 구절들은 예수님께서 ‘먹고, 마시고, 입는’ 일상적인 필요에 대해서 걱정하고 그것을 구하는 기도를 <이방인의 기도>라고 규정하시고 하지 말라고 하는 장면입니다. 예, 예수님은 “나의 자녀들은 굳이 이런 일상적인 필요를 구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모순 아닙니까? 예수님이 주기도문에서는 정반대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의 의미가 <일상의 필요>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4번째 간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일용한’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에피우지온’(ἐπιούσιος)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저도 원어 쓰는 거 싫은데… 내용을 이해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다능…ㅠㅠ) 여러분, 이 단어는 굉장히 독특한 단어입니다. 뭐가 독특한가 하면 남아 있는 헬라어 문학에 한번도 발견된 적이 없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오직 신약성경 전체에서 딱 한번 주기도문에 쓰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비교대상이 없으니까요… 우리가 단어의 뜻을 잘 이해하려면 이런 저런 용례를 봐야 하는데 그게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이 단어가 뜻하는 바를 알 수 없기에 다양한 해석과 주장이 난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는 ‘일용한 양식’이란 <삶에 필요한>이라던가, <오늘 필요한>이라는 의미로 번역되었지요.
그런데요. 우리 장로회가 따르는 개혁교회의 전통에서는 <오는(‘오늘’ 아님 주의) 날에 필요한 / 다음 날에 필요한>이라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오늘이 아니라, ‘다가 오는 날’과 ‘다음 날’이라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비교대상어가 없어서 해석하기가 어렵다면서요”라고 이야기하겠지요? 학자들은 이 단어의 근거를 2세기 시리아어 신약성경에서 찾았습니다. 시리아어는 예수님이 직접 사용하셨던 ‘아람어’와 가장 유사한 언어입니다. 그러니 고대 시리아어 성경에서 이 ‘에피우지온’이라는 단어를 어떤 아람어로 번역했는지를 보면 그 뜻을 찾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 이 시리아어 주기도문의 네번째 간구를 직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 영원한 빵을 주소서” 여러분! <내일의 양식>이란 무엇일까요? <영원한 빵>이란 무엇일까요? 여기서 <만나>를 떠올리신 분은 성경을 통섭하는 눈을 가진 사람 우후훗!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렸던 만나를 떠올려 봅시다. 만나는 일주일 중 5일동안에는 매일 하루 먹을 양을 거두게 했고, 그중 6일째에는 평상시보다 2배를 거두어도 상하거나 벌레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6일째 날의 다음 날인 7일째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는 쉬기 위하여 그 전 날에 2배를 거두어 들이도록 했습니다. 그 말은 <내일의 양식>을 거두면서 다음 날 <안식의 날>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만나>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 말은 오늘 이 네번째 간구는 “내일의 양식, 오는 날의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해석해야 맞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기도를 우리의 언어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 우리는 이 땅에서 당신이 주시는 영원한 안식의 날이 올 것을 소망합니다. 그 확신 때문에 이 땅에서 성도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나에게 그 영원한 안식에 대한 확고한 소망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해야 할 <내일의 양식>이란 무엇을 가르키는 것일까요? 예, 여려분! 하늘의 양식, 생명의 떡, 참 떡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32절과 3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번 읽어 볼까요?
- [요6:3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 [요6:3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정리를 하자면, 이 기도는 “오늘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에 대한 확신이 있기를 원합니다”라는 간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영원한 안식에 대한 확신은 <하늘의 양식>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으로만 확인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에 대한 첫번째 기도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함께 있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됩니다. 자, 다 정리해서 이 <오는 날에 필요한 것>을 구하는 기도를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영원한 안식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안식이 하늘의 떡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음을 압니다. 그러니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주십시오.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며 이 땅을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의 실제 삶의 행동 역시, 이 땅의 여러가지 고난과 환란 가운데에서도 성도가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며 믿음으로 살아내게 됩니다. 여러분! 영원한 안식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여러분의 삶에 예수님의 임재가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