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기도라고 다 같은 기도인가?!
여러분, 우리가 본격적으로 주기도문의 첫번째 파트로 들어가기에 앞서서 잠시만 알아야 할 배경지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기도와 다른 종교의 기도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굳이 짧은 이 지면을 빌어서 이 말을 해야 하는 이유는 이 것을 아는 것이 주기도문을 이해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기도’는 모든 종교에 있습니다. 기도가 없는 종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도와 기독교의 기도가 어떻게 다른가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라고 하며 ‘다름’을 말씀하십니다. 기독교 기도만의 차별점!!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신이 인격적인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다른 종교의 기도를 잘 생각해 보세요. 내가 그 종교가 따르는 신이 누구인지 몰라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가 부처님에 대해서 잘 몰라도 불공을 잘 드리면 소원 성취할 수 있습니다. 성황당에 모신 귀신이 누구인지 몰라도 정한수를 떠다놓고 열심을 들이면 소원이 성취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도는 이와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 맺기 위하여 먼저 찾아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알고 계시며, 우리에게 자기를 알려주시고 싶어하시는 분입니다. 더 깊은 관계를 원하십니다.
- (히브리서 1:1–2)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자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알리기 위하여 옛적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찾아오셨고, 신약에는 예수님의 오심으로 찾아오셨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전제를 가져야 합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에게서 들으시는 분입니다. 이것을 전제로 두는 것은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면서 그 분을 다른 종교의 신들처럼 비인격적인 분으로 대한다면 그 분은 무시 당한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 맺기를 원하셔서 먼저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기도는 그 하나님에게서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얻어내기만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분과 진실되게 대화하며 그 분을 알아가는 기쁨을 누리는 인격적인 관계를 위한 도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그 분은 이미 다 알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 (마태복음 6: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늘에 계신]
자, 이제 본격적으로 주기도문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여러분들은 기도를 시작할 때 어떻게 시작합니까? 여러분의 기도를 지금 잠시 한번 떠올려 보세요. 일단 손을 깍지끼고 눈을 감고 하나님께 무엇을 부탁해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바로 무언가를 구하기는 좀 민망해서 감사할 제목들을 아뢰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예,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 사실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앞서서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분, 먼저 찾아오시는 분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할 겁니다. 그렇다면 내 기도를 들으시는 그 분을 불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호칭’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저를 부를 때는 “(동광교회 청년부를 담당하는 잘생긴) 배준영 목사님!!”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이렇게 호칭을 부르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결정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군가를 향하여 “야!! 귀여운 이국종이!!”라고 부른다면, 우리가 입을 벌려 말하는 순간, 내가 이국종이라는 사람을 귀여운 자로 인식하고 있고, 내 머리 속에는 그가 왜 나에게 귀여운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가 평소에 옷을 귀엽게 입었다던지, 나를 향하여 애교 섞인 말투로 “뿌잉뿌잉"이라고 말한다던지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를 향하여 장난스럽게 “아침은 먹고 다니냐?”라고 친근하게 인사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순간,우리는 우리의 머리 속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 분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가 떠오르고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태도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이 태도로 인하여 그 뒤에 나의 모든 기도의 태도가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엄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일단 우리는 나 자신을 점검하고 시쳇말로 ‘회개’부터 쌔려박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죄송해요. 또 죄를 지었어요. 알고 있는 죄도 있는데요, 제가 잘 모르고 지은 죄도 있을 수 있어요. 일단 죄송해요.”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라고 합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물리적인 분이 아니시고 영이신 분이십니다. 여기서 하늘이란 유대인들의 언어 방식 때문에 생겨난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기를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 대신에 <하늘 나라>라는 말을 사용하고는 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하늘은 ‘sky’가 아니라 ‘heaven’이겠지요. 거기에 계신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요? 세상보다 크신 광대하신 분이시고, 전능하시며, 위대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우리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 분 앞에 제대로 서있는 것은 사실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것을 깨닫게 된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이렇게 말하겠습니까?“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니”(사사기 13:22) 우리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떠올려 보세요… 휴… 가슴이 벌렁벌렁 합니다.
[우리]
그런데 그 하나님을 가르켜서 “우리”라고 묶어 버리십니다. 세상에!! 그 분과 내가 묶일 수 있다니요! 그 분과 관련될 수 있다니요!!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우리가 그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이 기도가 우리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면 딱 머리 속에 스쳐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십자가가 떠올랐다면 당신은 DK청년👍🏻!!)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자기의 몸으로 허무신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으로 인하여 회복된 관계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예, 그렇기에 엄밀히 말해서 누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의 의를 전가 받은 ‘그리스도인’들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 (히브리서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오직 1년에 딱 한번 대제사장들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신분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아버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요? 물론 익숙한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교회에서 일단 기도하라고 하면서 “하나님 아부지~~”라고 기도하게 가르치니까요. 그런데 이게 얼마나 대단한 명령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감히 어떻게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바울은 아주 명확하게 이렇게 설명합니다.
- (로마서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그 아빠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 육신의 아버지를 투영하지만, 여기 나오는 아버지는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아빠입니다. 그 아빠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이미 그것을 주실 준비가 되어 있지만, 아들이 기꺼이 아빠에게 요청하기를 기다리는 분입니다. 자녀를 향한 절대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시며 심지어 능력이 많으신 분입니다. 그 아빠가 우리와 대화하기를 기뻐하시고,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이렇듯 우리의 아빠가 되어 주시면 우리는 그 분께 어떻게 나아갈 수 있습니까? 예, 사랑 받는 자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분께 구하지 못할 것이 무어가 있습니까? 설령 그 분이 내가 구하는 무언가를 주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분에게 섭섭해 하거나 삐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아빠가 볼 때, 그게 지금 나한테 별로 도움이 안되어서 안 주시는 거겠지.”
결론 : 하나님을 부르는 것으로 결정되는 우리의 태도
아휴… 길게 이야기 했습니다. 오늘 전체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그 분을 부르는 호칭으로 우리는 기도의 태도를 결정한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여러분이 제대로 된 기도를 하고 싶다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인격적이신 분이라는 전제를 두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저 늘 입에 붙어 있는 미사어구처럼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ssg 넘어가기보다, 여러분이 기도를 시작할 때 여러분의 머리 속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려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하고 영화로우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전혀 관계 없던 나와 관계를 시작하셨을 뿐 아니라 진노의 자식이었던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하시고, 아들 예수님께 베푸시던 사랑을 우리를 향해 즐거이 베푸시는 분”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주기도문을 통하여 가르쳐 주고자하시는 첫번째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우리 다시 기도를 시작해 봅시다. 지금까지 기도의 습관을 잠시 내려놓고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를 시작할 때 우리의 기도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기도가 될 것입니다.
참고문헌 및 더 깊은 연구를 위한 참고자료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스탠리 하우어워스)
어떻게 기도할까(R.C 스프롤)
깊이 읽는 주기도문(김남준)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주기도문(김형국)
순전한 기독교(C.S 루이스)